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푸시킨 (문단 편집) === 중반 ===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에 맞게 외무성에 들어가 10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. 워낙 전형적인 생활이었기 때문에 곧 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.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[[낭만주의]] 문학 그룹에 동참했다. 유명한 서사시 '루슬란과 류드밀라(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)'를 발표한것도 이 무렵. 푸시킨은 이 무렵 러시아의 [[농노제]]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 당한다.[* 말이 전근이지 사실상 '''유배'''. 그래도 [[오데사]]의 사교계를 계속 들락날락 거리며 오데사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.] [[오데사]]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한다. 1825년에 [[모스크바]]와 [[상트페테르부르크]]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지방에서 짱박혀 있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.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은 [[데카브리스트의 난]]으로 숙청당했다.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 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[[예브게니 오네긴]]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. 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[[모스크바]]와 [[상트페테르부르크]]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푸시킨은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된다. '''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 것.'''[* [[니콜라이 1세]]가 푸시킨의 작품들을 직접 검열했다.]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다.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다.[* 이렇게 만든 시들을 시집으로 묶어 발표했는데 두 달 만에 모두 품절.] 그리고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[[예브게니 오네긴]]을 완결 짓고 여러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. [[스페이드의 여왕]], [[대위의 딸]][* [[푸가초프]]의 난을 배경으로 한 소설.]등 푸시킨의 대표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이다. [[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#s-7.2|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]]으로 설정한 희곡인 <모차르트와 [[안토니오 살리에리|살리에리]]>도 썼고, 그것을 [[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]]가 1898년에 오페라화 했다. 이후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[[아마데우스(희곡)|아마데우스]]에도 영향을 미쳐 연극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, 1984년 [[아마데우스(영화)|영화화]]되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이 더욱더 알려지게 된 것이다. 단, 독살은 푸시킨의 희곡에서만 했고,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간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나온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